인터넷 커뮤니티가 자리잡 던 시절. 어렸을 때 접했던 이 사건은 성인이 된 아직도 기억에 남는 최악의 사건이라는 생각이든다.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은 1988년 11월 26일부터 1989년 1월 4일에 걸쳐, 일본 도쿄도 아다치구 아야세에서 일어난 유괴·약취, 감금, 강간, 폭행, 살인, 사체 유기 사건의 통칭이다.
-피해자 여고생과 가해자의 사진이 담긴 실제 신문에서 발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 중이던 여고생을 납치, 감금한 뒤 폭행하였으며 인분과 배설물, 쓰레기, 곤충을 먹게 한 뒤 피해자를 타살하였다.
타살한 시신은 드럼통에 넣은 뒤 콘크리트를 부어 암매장하였으나, 이상한 냄새를 맡은 행인의 제보로 사건이 드러나게 됐다.
이 사건은 가해자가 모두 소년이면서도 범죄 내용이 중대·악질적이며, 범죄 기간도 장기적이며, 처벌이 미약하다는 점, 여고생 소녀가 감금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던 주위의 목격자들도 피해자들을 구하지 않았다는 점 등으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현재까지도 한국과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 사건이다.
당시 범인들의 나이는 고작 16~18살의 소년들이었다.
범인들의 이름은 미야노 히로시, 오구라 유즈라, 미나토 노부하루, 와타나베 야스시 그 외 여러 명…
(이들의 이름을 각각 A, B, C, D, …로 분류하겠다.)
주요 가해자
주범 격의 미야노 히로시(A)는 당시 18살로 도쿄에서 부모님,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증권회사 일로 바빴고 어머니도 피아노 강사로 바빠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 했다.
또 부모님 사이도 서로 한 지붕 아래 살지만 이혼만 안 했을 뿐 서로 소원했다.
A는 중학생 때 유도를 했고 학교에서 추천받아 도쿄 내 부속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하지만 성격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선배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A는 화풀이로 길거리에 양아치들이나 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폭행하는 등 여러 가지 말썽을 일으켰고 결국 고등학교 1학년 때 퇴학 당한다.
그 후 타일 만드는 가게에서 일하다가 그만두고 폭력단을 만들어 소매치기나 본드를 흡입하고 야쿠자들과 어울렸다.
그 뒤 중학교 때 자신의 후배였던 B, C, D들과도 계속 연락하면서 지내다가
미나토 노부하루(C)의 형 G(당시 17살)가 타는 오토바이를 A가 찾아주면서 C의 집을 출입하게 됐고, A가 와타나베 야스시(D)의 누나와 사귀면서 D는 A의 부하가 되었다.
가해자 오구라 유즈루(B)는
당시 17살로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해 어머니, 누나와 함께 살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술집에서 일했고 그의 어머니 또한 아들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B는 사립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1학년 때 퇴학 당한 뒤 야간 학교를 2개월 다니다 그만두고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가해자 미나토 노부하루(C)는 당시 16살로 지역 병원의 사무장을 하고 있는 아버지와 그 병원에서 간호사 일을 하고 있는 어머니, 고등학생인 17살 형(G)과 함께 살았다.
역시 C의 부모들도 사이가 나빠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이들 역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C는 공업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1학년 때 퇴학 당하고 아무 일 없이 놀고 있었다.
가해자 와타나베 야스시(D)는 당시 17살로 5살 때 부모가 이혼하고 어머니, 누나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이혼 후 교통사고로 사망, 어머니는 미용사로 일하면서 역시 일이 바빠 아들과 딸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D는 공업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바로 퇴학 당한 뒤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사건의 배경
사건 현장이 된 C의 가정은 부모님이 맞벌이로 인해 집이 비어있는 상태가 많았고, 가정 불화로 인한 폭력으로 부모들은 자식을 무서워 해(어린나이에도 성인나이의 어른이 위협을 느꼈다.), 자택 2층 거실은 불량 청소년 집단의 아지트가 되어 있었다.
사건의 개요
1988년 11월 25일
A는 아르바이트 후 자전거로 귀가 중이던 17살의 여고생을 발견했다.
A는 C를 시켜 소녀의 자전거를 발로 차도록 지시했다.
C는 소녀의 자전거를 발로 걷어찬 뒤 소녀가 자전거와 함께 넘어지자 도주했다.
A가 나타나 자전거 민 놈이 자신에게도 위협했다면서 혼자 가면 위험할 테니 자신이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소녀를 안심시킨 뒤, 소녀의 집 근처에서 돌변해 나는 야쿠자 간부인데 너를 사고로 위장해 차로 치어 죽이려 한다.
곧 차가 도착하는데 시키는 대로 하면 살려주겠다고 위협해 모텔로 끌고 가 소녀를 성폭행했다.
성폭행 뒤 야쿠자가 널 죽이려고 하지만 내 여자친구(D의 친누나)를 닮아 살려주고 싶다, 너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윗선에 잘 얘기할 테니 그때까지 우리와 함께 있자라고 말한 뒤 그들의 아지트인 소년 C의 집으로 소녀를 데려간다.
가해자 C의 집
이날 C의 아버지는 3일간 여행으로 오키나와에 가 있었고 집에는 C의 어머니와 한 살 위인 형 G가 있었다.
그날 오후 10시경
A는 B와 D까지 C의 집으로 불러 번갈아가며 소녀를 성폭행했다.
신고하거나 도망가면 야쿠자가 소녀의 가족을 몰살할 거라고 말해 소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협박했다.
1988년 11월 28일
A는 좋은 걸 보여주겠다며 다른 후배 E(당시 17살), F(당시 16살)까지 불러 소녀를 강간했다.
소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1층에서 C의 어머니가 잠을 자지 않고 있었지만 이불이나 베개로 소녀의 얼굴을 덮어 C의 어머니는 소녀가 비명 지르는 것조차 몰랐다. (과연 몰랐을까?)
1988년 11월 30일
소녀의 부모가 경찰에 신고할 것을 두려워한 소년들은 A의 제안으로
소녀의 부모에게 공중전화로 친구 집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5일에 걸쳐 3회씩 전화하게 시켰다.
오후 9시경
C의 어머니는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생리대를 발견했고 뭔가 이상함을 느낀 C의 어머니가 2층 C의 방문을 열었을 때 C와 D 그리고 옆에 소녀를 발견했다.
C의 어머니는 소녀에게 식사를 대접하면서 대화를 시도했고 아들에게 밤이 늦었으니 소녀를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말했다.
1988년 11월 31일
자신의 어머니에게 소녀가 돌아갔다고 거짓말했지만 뭔가 이상함을 느낀 C의 어머니는 소녀 집에 전화를 걸었다.
소녀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자 C의 어머니는 집에 이런 이름의 딸이 있느냐고 물었고, 소녀의 어머니는 지금은 없다고 말하며 누구냐고 묻자 C의 어머니는 당황해서 가짜 이름을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서 소녀를 집으로 돌려보내는데 소녀는 C와 C의 형에게 다시 붙잡혔고, 자신의 부모가 잠든 틈에 전봇대를 이용해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고, C는 어머니에게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며 어머니를 수시간에 걸쳐 폭행했다.
그런 뒤 C와 C의 형은 소녀를 18시간 폭행하고 성 고문했다
1988년 12월 1일
A, B, C, D 4명이 잠든 틈을 타 소녀는 경찰에 신고했지만 A에게 들켜 전화가 끊겼고, 경찰에게 다시 걸려온 전화는 A가 받아서 장난 전화였다고 무마했다.
전화를 끊은 뒤 A는 소녀를 폭행한 뒤 몸에 기름을 발라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또 음부와 항문에 불꽃놀이를 안쪽으로 꼽아놓고 터트렸다.
부검 당시 소녀의 대장과 자궁 및 질벽에 심한 화상이 발견됐다.
그 뒤 계속된 폭행과 화상에 상처는 곪을 대로 곪았고 소녀는 신고의 엄두조차 내지 못 했다.
C는 소녀가 아래층 화장실을 사용하는 대신 종이팩에 일을 보게 했다.
아니면 소녀가 배설한 소변, 대변을 먹게 했다.
또 베란다에 알몸으로 쫓아내 여러 개의 담배를 한꺼번에 피우게 했고 그때마다 웃지 않으면 폭행을 가했다.
또 A의 여자친구(D의 친누나)는 소녀의 뺨에 매직으로 수염을 그리고 A는 타게다 테츠야의 ‘성원’이라는 곡에 맞춰 소녀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소년들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자기들 집에 재미있는 게 있다며 주변인들에게 자랑했고 소녀를 직접 폭행과 강간에 관여한 사람은 10여 명이 더 있었다.
1988년 12월 5일
도쿄의 한 전철역에서 전차의 충돌사고가 일어났다.
A는 소녀에게 저 전차에 네 아버지가 타고 있었는데 죽었다, TV 나왔는데 봤냐고 물었다.
소녀가 불안한 표정을 짓자 지금 어떤 기분이냐고 물었고 소녀가 슬프다고 답하자 A는 뻥이야라고 말했다가 다시 진짜라고 말했다가.
소녀를 심리적으로 몰아붙였다.
1988년 12월 10일
소녀는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자 A가 집에 돌아가면 엄마한테 뭐라고 변명할 거냐고 묻자
소녀는 지금까지 신주쿠에서 놀았다고 할 거라고 대답하자
A는 신주쿠에서 교복으로 지금까지 그렇게 길게 놀 수 있을 것 같냐고 말하며 소녀를 폭행했다.
A는 소녀의 화상 입은 흉터에 기름을 붓고 라이터에 불을 붙였고 소녀가 뜨거워하며 불을 끄려고 발버둥 치면 가만있으라고 폭행했다.
1988년 12월 중순
소녀가 이불에 오줌 쌌다는 이유로 B와 C가 폭행했다.
계속된 폭행에 소녀의 얼굴은 처참하게 부었고 그 모습을 본 소년들은
소녀의 얼굴을 보며 놀리고 웃었다.
후에 소녀를 부검할 때 소녀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어 있었다.
또 그들은 소녀에게 우유나 건포도 등을 줬지만 소녀가 음식물을 삼키지 못하고 토해내면
더럽다고 구타하고 손, 발, 무릎, 정강이에 기름을 붓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소녀는 계속 뭐든지 할 테니 제발 집에 보내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때마다 얼굴에 양초물을 떨어트리고
알몸으로 춤추게 하거나 자위를 강요하고 소녀의 음부와 항문에 온갖 이물질과 벌레를 집어넣고
직경 3cm 철봉이나 음료수 병을 음부에 삽입하게 시켰다.
이때 C의 부모는 2층 아들방에서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고 있었다.
C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어보면 보복 당할 것이 두려워 모른 척하고 있었다.
소녀는 계속된 폭행에 걷지 못했고 전신은 쇠약해졌으며 몸에서는 심한 악취가 났다.
소년들은 소녀의 몸에서 악취가 난다고 가까이 가지 않았고 소녀가 차라리 죽어줬으면 좋겠다고 바라기 시작했다.
그들은
“저 여자 죽여서 묻을까?”
“죽일 거면 살을 다질까?”
“드럼통에 넣어서 구워버리자”
“콘크리트에 채워 넣어 바다에 버리면 안 들킬 거야”
“자살로 보이게 죽일까?”
“목이라도 매달까?”
등의 이야기를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주고받기 시작했다.
1989년 1월 4일
감금된 지 41일째 되는 날
A는 게임장에서 10만 엔 정도를 날린 것에 매우 화가 나 있었고 그 화풀이 대상은 소녀였다.
B, C, D 3명도 소녀의 화상에서 나는 악취를 싫어해 D의 집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A는 D의 집에 와서 3명을 불러내 C의 집 2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코이즈미 코우코의 ‘뭐라고 해도 난 아이돌’이라는 곡의 리듬에 맞춰 소녀를 폭행했고
소녀의 코나 입에서는 피가 흘러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 폭행했고 양초에 불을 붙여 소녀의 얼굴에 양초물을 떨어트렸다.
D는 자신의 손에 소녀의 피가 묻는 게 싫어 A가 본드를 흡입한 검정 비닐봉지를 손에 감아 소녀의 어깨나 다리에 주먹을 날렸다.
곧 소녀의 몸은 경직됐고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꾀병이라며, A는 1.7kg의 철봉을 가져왔고 D는 그걸 소녀의 배에 떨어트렸다.
A가 다시 폭행을 시작했고 B, C, D도 번갈아 가며 소녀를 폭행했다.
폭행은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A는 소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다리를 테이프로 돌돌 말아 묶은 뒤 4명은 사우나 하러 갔다.
1989년 1월 5일
아침에 소녀가 죽은 것을 확인한 소년들은 시체를 이불 2장에 감싸 여행 가방에 넣고
차를 타 가까이에 있는 공장에서 훔친 드럼통에 시체가 담긴 가방을 넣어 시멘트를 흘렸다.
시멘트는 A가 전에 타일 만드는 가게에 전화를 걸어 준비했다.
A는 당시 인기 있던 나가후치 츠요시 주연의 TV 드라마 ‘잠자리’의 최종화 비디오를 찾았다.
그것은 소녀가 납치되던 날 소녀가 그 드라마를 보기 위해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귀가하다가 이들에게 납치돼 그 드라마를 보지 못한 것을 자신들에게 말했기 때문에 죽은 소녀를 위해 그 비디오를 같이 넣어주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녀나 유족들에게는 아무런 구원도 되지 않은 일이었지만 A가 보여준 유일한 인간다운 면이었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해 A는 소녀가 불쌍하기보다 소녀의 저주를 받고 싶지 않아서 그 비디오를 넣어줬다고 말했다.
이들의 범죄가 밝혀진 것은 사건 발생 4개월 뒤인 1989년 3월 29일이었다
네리마 소년 감별소에서 아야세 경찰서 수사관이 1988년 11월에 있었던 강간, 절도 등에 의해 소년 감별소로 보내진 소년 A를 조사하던 중 담당 형사가 무심코
“너 사람 죽이면 안되잖아”
라는 질문에 다른 3명이 자백했다고 착각, 모든 사건 내용을 자백, 담당 형사는 당초 강간, 절도 사건의 조사를 미루고 반신반의한 채 A의 자백 내용대로 도쿄 코토쿠 와카스 15번지 해변 공원 정비공장 현장으로 향했다
현장에는 드럼통 한 개가 널려 있었고 드럼통의 콘크리트 틈새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경찰은 305kg 정도의 드럼통을 크레인으로 매달아 올려 경찰서로 가져왔고
그 다음날 오후
경찰서 내에서 콘크리트를 해체
여행 가방 안에 이불 2장에 싸여져 있는 여자 시체가 있었고 사망 후 2개월 이상이 경과해 부패가 상당히 많이 진행되어 있었다.
부검 결과 시신은 영양실조 상태였고 전신에 구타에 의한 부종이 퍼져 있었고
부검 당시 소녀의 대장과 자궁 및 질벽에 심한 화상이 발견됐다.
사인은 외상성 쇼크, 토사물에 의한 질식사로 여겨졌다.
시신의 상태는 안면이 심하게 함몰 및 변형되어 지문과 치아의 조합으로
1988년 11월 25일 밤 아르바이트 후 귀가 도중 행방불명된 야시오 고등학교 3학년 소녀인 것으로 확인됐다.
공판 기록에 의하면 변호사가
“그 정도의 폭행을 가하면 그녀가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라는 질문에
생각할 수 없었다고 답했다.
“죄를 뉘우치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소년 B, C, D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그중 소년 D가 가장 많이 반성하며 소녀는 폭행 뒤에 자신에게
“나는 집에 언제쯤 갈 수 있는거야”
라고 말하던 그 눈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소년 A는 자신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에게 욕을 하거나 자신이 운이 나빠 경찰에 잡혔을 뿐이라고 대답해 충격을 주었다.
1991년 7월 12일
일본 도쿄 고등 법원은
소년 A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고
소년 B에게는 징역 5~10년형의 부정기형
소년 C에게는 징역 5~9년형의 부정기형
소년 D에게는 징역 5~7년형의 부정기형을 선고했고
소년 E, F, C의 친형 G는 소년원에 수용됐다.
또 나머지 추가 가해자들에 대해서는 약식기소했다.
가해자 4명의 부모는 피해자 부모에게 사죄하며,
소녀가 묻혀있는 묘지에 방문하고 싶다고 장소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피해자 부모는 이를 거절했다.
또 가해자들의 형이 너무 가볍다며 재판장에서 비통한 심정을 토로했다.
이후 소년 A의 아버지는 집을 팔아 5,000만 엔의 돈을 피해자 유족들에게 건넸고
B의 아버지도 조금이라도 유족들에게 사죄하고 싶다며 직장을 나온 뒤 아르바이트해서 배상 용의 돈을 모으기 시작하는 게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이들 가해자들은 현재 모두 출소해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가해자들의 근황
가해자A, 미야노 히로시(宮野 裕史) 현재는 성을 요코하마(横山)로 변경, 현재 48세 (사건당시 18세), 1970년 4월 30일생
당시 사건으로 기소되어 깜빵을 가기 훨씬 이전부터 셀수 없을 정도로 여자를 마음대로 강간하고 다니고 폭력단을 결성하여 수없는 강도짓을 했다.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잔혹하게 폭행하고 다니고 자신의 부모 또한 상습적으로 폭행 했으며 유도부 출신으로 싸움을 잘하고 잔혹한 사이코패스이고
하치오지시 지역의 학교를 모두 제압했다. 2006년 가석방 후 공업소에서 노가다를 한다는것과 거주지가 밝혀진것 외에는 별다른 소식이 없다가
2013년 보이스피싱 피의자로 검거 되었지만 묵비권을 행사해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 후 현재는 사기쳐서 번돈으로 BMW를 끄는등 나름 호의호식하는 삶을 살고 있다. 사건 당시 이놈이 무리의 우두머리 였으며 피해 여고생을 납치 및 감금과 고문을 주도한 핵심 인물. 물론 현재도 일본내에서
따가운 눈초리와 욕을 먹고 살고 있지만 주요 가해자들 중에서 경제적으로는 제일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성을 변경한것으로 보아 호적에서 파인것 같다.
가해자B, 오구라 유즈루(小倉 譲) 개명한 이름은 카미사쿠 조(神作 譲), 현재 47세 (사건당시 17세), 1971년 5월 11일생
이놈은 당시 가해자들중 키가 180cm로 가장 컸으며 왼손의 손가락이 6개. 이놈도 별반 다를거없이 사이코패스라 사건 전부터 폭력적 성향이 강하여 싸움을 밥먹듯 했으며 길에서 자전거 타고 가는 여학생을 잡아 강간하거나 길가는 여학생의 옷을 강제로 벗기고 다녔다.
당시 무리중 부두목급이었고 이놈은 사건 당시 소년A 보다는 형량이 적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피해자를 제일 집요하고 잔인하게
괴롭힌놈이었다. 1999년 성인이 되어 출소했을땐 키가 190cm로 성장 되었다. 다른 가해자의 부모와는 달리 이놈의 애미는 피해자가 자기 아들의
인생을 망쳤다며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피해자를 원망 하고 있다. 출소 이후 중국 여자와 결혼을 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생활하려 했지만
중국 여자측 집안에서 이놈의 실체를 알게되 이혼을 하게 되어 중국행이 무산되자 흉기를 들고 중국 공항까지 가서 난동을 부리다 공안에게 체포되었다.
이후인 2004년엔 자신의 애미가 운영하는 스낵바에 어떤 남자를 자신의 여자를 건드렸단 이유로 납치 및 감금후 밤새도록 폭행하여 체포 기소되어
징역 4년이 선고되었다. 그 이후로는 조용히 살고 있는지 별다른 소식이 없고, 감금 당한 피해자가 증언하길 이놈은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며
자신이 피해 여고생에게 저지른 행위들을 자랑처럼 얘기 했다고 한다.
가해자C, 미나토신지(湊 伸治), 현재 46세 (사건당시 16세), 1972년 12월 16일생
당시 피해 여고생이 감금 당했던곳이 이놈 집의 2층 본인방 이었다. 납치는 소년A가 했지만 가해자중 피해 여고생을 이미 알고 있던 인물
이놈은 피해자를 감금 초반엔 A와 B에 비해선 비교적 우호적으로 대해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자가 괴로워하는 모습이
재밌다고 느껴져 갈수록 더욱 잔혹한 고문을 행하고 동참하였다. 당시 이놈의 친형 또한 피해 여고생이 감금된것을 알고도 방치했단 이유로
같이 기소 되었지만 가담은 전혀 없었기에 소년보호처분으로 끝났고 이놈의 부모들은 일본사회에서 꽤나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해당 사건 이후로 모두 소속된 곳에서 파면 당했다. 출소 이후 레스토랑에서 무에타이 선수로 활동하며 준수한 전적을 올렸지만
이놈의 정체를 알고 있는 관객들로부터 항상 야유를 받아왔다. 격투기 선수 은퇴 이후로 2006년에 유럽 여성과 결혼하여 오사카로 이주를 하였고
2007년 간병인 자격증을 취득 이후 파칭코 가게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정황이 포착 되었다. 이후인 작년 2018년 8월 19일 주차 문제로 인해
이웃과의 다툼중 상대 남성을 삼단봉으로 내려치고 목과 신체를 나이프를 수차례 찔러 체포 기소 되었는데 재판장에서 보여진 모습은 후덕해진
중년의 모습이었으며 거짓 진술을 하는둥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건을 목격했던 주민들의 얘기로는 주차문제 때문이 아니었고
평소 미나토신지는 새벽에 층간 소음을 일으키거나 동네 주민들에게 상습적으로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이에 항의하던 특정 주민과의 신체접촉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흉기를 꺼내 찌르게 된것. 재판은 아직 진행중이고 중형을 피하긴 어려울것으로 보인다.
(마땅한 사진 없음)
가해자D, 와타나베 야스시(渡邊 恭史), 현재 47세 (사건당시 17세), 1971년 12월 18일생
이놈은 중딩 1학년 시절 학급에서 왕따를 당했지만 이놈의 누나가 사건을 주도한 소년A인 미야노 히로시와 연인 관계를 계기로
소년A와 친분이 생긴 이후로 자연스레 왕따에서 벗어나 학교에서 힘을 과시하게 되었다. 이후로 이놈도 흉기를 소지하고 다니고
학교 기물을 부시고 오토바이를 훔치는등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지만 사건 당시에 강간에 참여하는것을 제외한 폭행 고문등에는
넷중에서 가담도가 제일 적었고 다른 가해자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반성을 하고 있는 인간이다. 사건 당시에도 피해자를 매우 불쌍하게 여겼지만
자신은 힘이 없어 피해자를 도와주지 못했다라고 진술을 하였다. 복역 당시 동료 재소자들에게 해당 사건의 공범임이 들통나 심한 폭행을 당해
신체 일부에 장애가 생겼다. 1996년 출소 이후로는 히키코모리로 살아가다 노가다에 종사하며 자신의 친누나집에 얹혀 산다고 한다.
그렇게 조용히 살고 있는듯 했으나 불과 작년인 2018년 8월 24일 살인죄로 체포 되었다.
일본 여고생 콘크리트 사건 종료. 유머 맛집